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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트랜드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

과학 기술을 통해 개도국 저소득층의 복지 증진과 지역 사회 발전을 도모하는 적정기술이 사회 양극화 확대와 IT기술 발전으로 최근 다시 주목 받고 있다. 적정기술은 무엇보다도 개도국 현실에 맞는 제품 개발이 중요하다. 적정기술은 기업 CSR과 역혁신의 단초로도 활용될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의 지속적인 발전은 인류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었다. 형광등과 LED 조명의 확산으로 밤에도 대낮처럼 활동하고 에어컨과 전기 히터의 발전을 통해 날씨에 상관 없이 쾌적한 실내 생활을 영위하며 최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초고속 인터넷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깨끗한 물이나 전기를 공급받지 못한 체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가는 개도국 빈민층도 많은 상황이다. 실제로 미국의 C.K. 프라할라드 교수에 따르면 연 소득 3,000달러 미만의 글로벌 저소득층인 BOP(Bottom of Pyramid) 인구는 40억 명에 달할 정도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기존 산업 기술의 부작용도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 화석연료의 지나친 사용으로 환경 파괴 및 기후 변화가 가속화되었고, 한정된 자원을 놓고 국제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약 70억 세계인구 절반 이상이 근대의 물질적 풍요를 제대로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인류의 지속 발전도 위협받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기술이 해야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최신 스마트폰, 전기 자동차와 같이 선진국 소비자나 개도국 부유층을 위한 첨단기술이 아닌 저개발 국가의 빈민층까지를 포함한 보다 광범위한 복지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기술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적정기술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적정기술이란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적정기술의 기본 개념은 오래되었다. 20세 초반 인도 독립운동가인 마하트마 간디를 그 시초로 볼 수 있다. 간디는 영국의 방직기가 들어오면 인도의 전통 섬유산업이 붕괴되고 지역 경제가 황폐해지는 암울한 현실에 대응하여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물레를 돌려 직접 옷을 만들어 입고 다녔다. 무작정 근대 산업기술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국민의 상황을 고려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긴 했지만 간디의 지역 사회화된 기술에 대한 이러한 시각을 발전시켜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이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E.F. Schumacher)이다. 슈마허는 1973년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라는 저서에서 근대 산업사회의 대량 생산 기술은 폭력적이고 생태계를 파괴하며 재생할 수 없는 자원을 낭비하기 때문에, 지식과 경험을 잘 활용하고 분산화를 유도하며 생태계의 법칙과 공존하면서 희소한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 기술인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중간기술을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Technology with a Human Face)’로 표현하여 인류 복지 향상을 위한 중간기술의 역할을 거듭 강조하였다. 또 그는 중간기술 개발그룹(ITDG, Intermediate Technology Development Group)을 설립하여 중간기술 확산에 평생을 매진하였다. 이후 ITDG에서 중간기술이 첨단기술과 비교되는 것을 피하고 기술에 정치 사회적 의미를 포함시키기 위해 중간기술을 ‘적정기술’로 재정의하여 이 개념이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적정기술이 등장한 이후 MDG (Millennium Development Goals), 미국의 NCAT(National Center for Appropriate Technology)와 같이 각국 정부와 NGO 등을 중심으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또 MIT, 스탠포드와 같은 학교에서도 강좌를 열어 학생들에게 적정기술을 가르치고 있으며 ITDG가 새롭게 이름을 바꾼 Practical Action, 국경 없는 공학자(EWB, Engineers Without Borders), IDE(International Development Enterprise), D-REV(Design Revolution), KickStart 등등 다수의 전문기관이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 정부도 최근 11월 ‘R&D 36.5℃ 전략’에서 저개발 국민을 위한 적정기술의 개발·보급 및 확대를 발표하였고, 민간부문에서도 학계와 NGO를 중심으로 적정기술 포럼 및 컨퍼런스 개최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이다.


왜 지금 적정기술인가

적정기술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너무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적정기술이 등장한지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까지 널리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이다. 게다가 고속성장을 이뤄온 지난 수십 년간 최첨단 기술의 그늘에 가려 적정기술에 쏟아지는 관심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이 바뀌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 되면서 복지에 대한 관심이 늘고, 친환경 그린 기술이 각광받으며, IT 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기 쉬워지면서 적정기술이 다시금 주목 받는 중이다.

우선 경제 악화로 사회 양극화 이슈가 부각되면서 사회적 나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경제적 빈곤 상황에 처하는 사람이 늘면서, 고속 성장시에는 잘 보지 못했던 주위의 소외된 이웃을 둘러보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실제로 기존 시스템의 불합리한 문제점을 보완하고 사회적 책임과 나눔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자본주의 4.0’, ‘따뜻한 자본주의’ 같은 용어가 이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정부와 기업도 달라진 사회적 기대와 요구 수준에 맞추기 위해 복지예산과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강화하는 추세이다. 이러한 관심이 선진국 저소득층을 넘어 글로벌 BOP 계층으로 확산되면서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게 된 것이다.

둘째로 그린기술의 부상이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증가시켜 각종 이상기후를 일으키는 화석연료는 물론 안전한 에너지원으로 여겼던 원자력까지도 인체에 치명적인 방사능 누출 문제가 존재하면서 신재생에너지, 전기자동차와 같이 자원을 덜 사용하고 에너지 효율적인 친환경 녹색기술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게다가 무분별한 자원 소모 문제도 심각하다. Global Footprint Network의 연구에 따르면 모든 지구인이 현재 미국인의 소비 생활 수준을 영위한다고 가정할 경우 4.4개의 지구가 필요할 정도이다. 따라서 그린기술과 마찬가지로 에너지 효율적이고 친환경적인 적정기술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있다. 실제로 OECD는 적정기술을 친환경기술(Environmentally Sound Technologies)과 직접 연관시켜 정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셋째로 IT 기술 발전을 들 수 있다. 적정기술 제품들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과학적 이론이나 최첨단 기술보다는, 저렴하고 특정 환경에 맞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스미소니언 연구소는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other 90%)’ 책에서 ‘전세계 90%의 재능 있는 디자이너들이 구매력을 갖춘 전세계 10%의 사람들을 위해 디자인 한다’고 주장했듯이 적정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인터넷으로 세계 곳곳과 연결되고 스마트폰, SNS 사용이 늘어나는 지금이 적정기술 확산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적정기술 개발에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을 활용하거나 적정기술 보급을 위해 웹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적정기술 거래 사이트인 Kopernik는 웹을 통해 적정기술과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적정기술 개발이 필요

하지만 적정기술의 앞날이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개도국 빈곤층에 대한 여타 경제지원 정책과 비슷하게 외부 지원에 의존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기침체가 장기화되어 각국이 자국의 문제 해결에만 집중하게 될 경우 그나마 유지돼왔던 적정기술에 대한 지원과 관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게다가 외부 지원은 과시적 성격이 강하고 일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 어느 작은 마을의 사람들이 우물을 얼마나 자주 사용하고 집을 어떻게 유지보수 하는가 보다는, 우물을 몇 개 파고 집을 몇 채 건설하였는지에 관심이 더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적정기술의 미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보다도 개도국 현장에 꼭 맞는 유용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제품 제작 시 당연히 신경써야 할 부분이지만 적정기술에서는 특히 강조되어야 할 사안이라 할 수 있다. 적정기술 제품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진국에 거주하고 있어, 전기와 물은 물론 제품 제작을 위한 일반 부품도 구하기 어려운 열악한 현지 상황을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상하수 시설이 없는 지역에서는 위생상 수세식 화장실이 아무리 좋아도 재래식 화장실이 유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되도록 현장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고, 제작 및 유지보수가 편하게 구조를 최대한 단순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가격도 개도국 빈곤층의 소득 수준을 고려하여 최대한 낮추어야 한다. 단순 기부 형식을 벗어나, 제품 가격이 현지인들이 제품 효용을 고려하여 구매를 한번쯤 생각해 볼 정도가 돼야 한다. 실제로 미국의 Nicholas Negroponte 교수의 주도하에 OLPC(The One Laptop per Child)가 내놓은 100달러 노트북 XO-1은 가격을 혁신적으로 낮춘 제품으로 평가되었지만, 인도 정부가 보기에는 100달러도 현지인에게 다소 비싸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10달러짜리 태블릿 Aakash를 별도로 개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Out of Poverty’의 저자이고 IDE, D-Rev을 설립하여 적정기술 확산에 수십 년을 앞장서 온 Paul Polak도 적정기술이 처한 이러한 상황을 2010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The Death of Appropriate Technology I: If you can’t sell it don’t do it’의 글에서 토로한 적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적정기술의 많은 실패사례가 현지 구매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가격의 제품을 내놓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많은 적정기술 기관들은 개도국 현장에 맞는 제품을 제작함과 동시에 적정기술 교육 및 사업화에도 노력하고 있다. 적정기술 제품의 유용성을 널리 전파하여 지속적으로 활용하게 하고 외부의 도움 없이도 적정기술이 자생할 수 있게 현지인들에게 제품 판매 및 관리를 맡기는 것이다. 일례로 적정기술 기관인 KickStart는 현황 분석(Identify Opportunities), 제품 설계(Design Products), 공급망 구축(Establish a Supply Chain), 시장 형성(Develop the Market), 성과 측정(Measure and Move Along) 방법을 통해 적정기술을 확산시키고 있는데, 제품 설계 이후 과정으로서 지역 사업화에도 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KickStart의 물펌프 Super Moneymaker를 통해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KickStart는 100달러인 Super Moneymaker가 아프리카 현지 농민에게는 다소 비싼 편이지만 장기적으로 수확량을 증가시켜 농가 수입을 10배 가까이 늘릴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구입할 가치가 있는 제품이라고 지역 사회 교육 및 제품 홍보에 노력하고 있다.


적정기술과 기업

적정기술의 확산을 위해서는 정부 및 NGO의 지원 이외에 기업의 역할도 중요하다. 개도국 저소득층의 복지 증진에 적정기술을 활용하는 많은 사회적 기업이 활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사기업에서도 적정기술을 CSR 또는 분산형 인프라 제품의 Testbed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적정기술을 활용한 기업 CSR 활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010년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글로벌 표준 가이드라인 ISO 26000이 발표된 이후 CSR은 이제 기업의 의무 사항으로 발전하였다. 더욱이 최근에는 마이클 포터가 기존 CSR을 한 차원 넘어서서 이익 극대화와 사회적 가치 창조를 동시에 창출하는 공유가치창조(CSV, Creating Shared Value) 개념을 발표하여 주목 받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기업과 사회가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 개발이 주목 받는 상황에서 적정기술은 중요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휴대용 전자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영국의 Freeplay Energy사는 UNDP와 손잡고 사람이 수동으로 충전할 수 있는 라디오 Lifeline을 아프리카 주민들에게 제공한 적이 있다. 최근에는 이를 더욱 개량하여 라디오뿐 아니라 MP3 파일도 들을 수 있는 Lifeplayer도 내놓은 상황이다.

적정기술을 활용한 기업의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참여도 기업이 생각해볼 항목이다. 2010년부터 우리나라는 OECD의 개발원조위원회(DAC,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 회원국으로서 원조 공여국이 되어, 2010년 국민총소득(GNI, Gross National Income) 대비 0.12% 수준인 ODA 비율을 2015년까지 0.25%로 증가시킬 계획이다. 적정기술의 경우 ODA의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는데, 일례로 독일기술협력공사(GTZ, Gesellschaft fuer Technische Zusammenarbeit)에서는 적정기술을 활용한 다수의 ODA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도 ODA 확대에 발맞추어 ODA와 기업 CSR의 시너지 효과 창출을 위한 민관협력모델(PPP)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중으로, 이에 상응하여 기업에서도 적정기술의 가능성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적정기술은 신제품 개발의 Testbed나 역혁신(Reverse Innovation)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개도국 현실에 맞춰 개발한 적정기술 제품을 선진국에 판매하거나, 새로운 제품 아이디어를 얻는 것이다. 특히 물, 전기, 통신 등 기본적인 사회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개도국 상황을 반영한 분산 및 독립형 인프라 제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Vestergaard Frandesen사의 라이프스트로는 상수시설이 없어 흙탕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개도국 주민을 위해 개발되었지만, 여행자의 비상 용품 및 긴급 재난 시 구호 제품으로 선진국에서도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이밖에 태양전지를 이용한 소규모 발전시설 및 가로등, 분뇨를 발효시켜 퇴비로 활용하는 생태 화장실 등에서도 이러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진정한 인간을 위한 기술이 되기 위해서는

승자독식(The winner takes it all)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이다. 최신 스마트폰으로 초고속 무선 인터넷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선진국 주민의 다른 편에는 아직도 물과 전기도 공급받지 못한 채 외부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개도국 빈민층도 많은 상황이다. 이 틈을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한 방법의 하나가 바로 적정기술이다. 적정기술은 선진국에서 더 이상 쓰지 않는 낡은 기술이 아니라 개도국이 처한 현실을 철저히 반영한 기술로서, 단순 경제 원조를 넘어서 과학기술을 통해 지역사회를 개발하고 개도국의 내적 역량을 강화시켜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단기 수익 창출에 힘쓰는 기업이나, 시시각각 변화하는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정부 입장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서기가 쉽지 않은 일일 수 있다. 적정기술에 대한 단순 관심을 넘어서 체계적 시스템을 통한 지속적인 지원 및 사업화에 대한 고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LG경제연구원 성낙환 선임연구원 www.lge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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